치평요람 제100권 / 후진(後晉)
필사_치평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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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평요람 제100권 / 후진(後晉)
[후한(後漢) 고조(高祖) 천복(天福)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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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언택이 평상에 걸터앉아 상유한을 접견하니, 상유한이 책망하며 말하기를, “지난해에 죄인의 가운데에서 공을 발탁하여 다시 큰 번진을 거느리게 하고 병권(兵權)을 주었는데 - 고조(高祖) 때에 조정과 재야에서 모두 장언택을 주살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장언택이 경주(涇州)에서 파직되어 돌아와 숙위(宿衛)가 되었다. 거년에 상유한이 그를 발탁하여 거란을 방어하게 하면서 다시 창국절도사(彰國節度使)로 임명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가 상산(常山)을 지키도록 하였다. - 어찌하여 이처럼 은혜를 저버렸는가?”라고 하니, 장언택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병사로 하여금 상유한을 지키도록 하였다.
선휘사(宣徽使) 맹승회(孟承誨)가 평소에 아첨을 잘하여 진제 석중귀에게 총애를 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진제가 그를 불러 일을 모의하려고 하니, 맹승회가 숨어서 오지 않았는데, 장언택이 그를 체포하여 죽였다. 장언택이 군사를 풀어 대규모로 약탈을 자행하니, 빈한한 백성이 그 틈을 이용해 서로 앞을 다투어 부잣집으로 들어가 사람을 살해하고 재화를 탈취하였는데, 그렇게 이틀 동안 하다가 바야흐로 멈추었다. 도성이 이로 인해 한결같이 텅텅 비어버렸다. 장언택이 거주하는 곳에 보화가 산처럼 쌓여있었는데, 그가 스스로 ‘거란에게 공로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주야로 술을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며 즐겼다. 그가 출입할 때 수행하는 기병(騎兵)이 항상 수백 인이었고 깃발에 모두 충심으로 주군을 위한다는 의미인 ‘적심위주(赤心為主)’의 글귀를 썼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비웃었다. 군사가 죄인을 사로잡아 앞에 대령하면 장언택이 무슨 범행을 하였는지 심문하지도 않고 단지 눈을 부릅뜨며 세 번째 손가락을 세우면 곧바로 끌고 나가 허리와 목을 절단하였다. - 세번째 손가락은 중지(中指)이다. 중지를 보인 것은 중간을 절단하라는 것이니, 바로 허리를 자르는 것이다. -
장언택이 평소에 합문사(閤門使) 고훈(髙勲)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장언택이 술이 취한 김에 고훈의 집에 들어가 그의 숙부와 아우를 죽여 문머리에 시체를 걸어두니, 사민(士民)들이 날씨가 춥지 않은데도 벌벌 떨었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이도(李濤)가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도랑으로 도망갔다가 죽음을 면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그를 찾아가 만나보아야겠다.”라고 하고 명함을 보내어 장언택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상소를 올려 태위(太尉)를 주살할 것을 청하였던 사람 이도가 삼가 찾아와 죽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언택이 기쁜 안색으로 접견하며 말하기를, “사인(舍人)은 오늘 두렵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도가 말하기를, “이도가 오늘날 두려운 것은 족하(足下)께서 옛날 두려워하였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번에 만약 고조께서 이도의 말을 들었더라면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라고 하니, 장언택이 크게 웃은 다음 술을 주며 마시라고 하자, 이도가 가득 따라 마시고 떠났는데, 마치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장언택이 진제를 개봉부(開封府)로 옮기면서 잠시도 머물러있지 못하게 하니, 궁중에서 통곡하였다. 진제는 태후 및 황후와 같이 견여(肩輿)를 타고 궁인과 환관 10여인이 도보로 수행하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진제가 내고(內庫)에 있는 금은(金銀)과 주옥(珠玉)을 가지고 가자, 장언택이 사람으로 하여금 풍자하기를, “거란주가 여기에 와 있으니, 물건을 숨길 수 없다.”라고 하니, 진제가 전부 돌려보내면서 장언택에게 나누어 주자, 장언택이 진귀한 보화만 취하고 나머지는 봉해놓고 거란주가 오기를 기다렸다. 장언택이 공학지휘사(控鶴指揮使) 이균(李筠)으로 하여금 병력을 동원하여 진제를 지키도록 하니, 안팎이 통래할 수 없었다. 진제의 고모 오씨공주(烏氏公主) - 오씨공주는 고조의 열한 번째 여동생이다. - 가 문지기 병사에게 뇌물을 주고 들어가 진제와 결별하면서 서로 붙잡고 눈물을 흘리다가 집으로 돌아가 목을 매어 죽었다. 진제와 태후가 거란주에게 올릴 표장(表章)을 먼저 장언택에게 보인 다음에 보냈다. 진제가 사자를 보내어 내고의 비단 몇 필을 가져가려고 하자, 담당자가 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황제의 물건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진제가 또 이숭에게 술을 요구하니, 이숭도 다른 핑계를 대고 진상하지 않았으며 이언도를 보자고 하였으나 이언도도 사양하고 가지 않으니, 진제가 한참 동안 서글퍼하였다.
풍옥(馮玉)이 장언택에게 아첨하여 자기가 전국보(傳國寶)를 호송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여 거란이 다시 자기를 임용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초국부인(楚國夫人) 정씨(丁氏)는 황자(皇子) 석연후(石延煦)의 어머니였는데, 미색이 있었다. 장언택이 사람을 보내어 데려오라고 하니, 태후가 머뭇거리며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장언택이 꾸짖으며 욕설을 하자, 곧바로 그녀를 실려 보냈다. 그날 저녁에 장언택이 상유한을 살해한 다음 허리띠를 그의 목에 놔두고 거란주에게 ‘상유한이 스스로 목을 매여 죽었다.’고 보고하였다. 거란주가 말하기를, “내가 상유한을 주살할 생각이 없었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단 말인가?”라고 하고 그의 집을 후히 어루만져 주라고 명하였다.
고행주(髙行周)와 부언경(符彦卿)이 모두 거란의 아장(牙帳)으로 찾아가 항복하였다. 거란주가 양성(陽城)의 전쟁에서 부언경에게 패배한 것을 거론하며 힐책하니, 부언경이 말하기를, “신이 당시에는 오직 진주(晉主)를 위해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만 알았으니, 금일의 사생(死生)은 오직 명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자, 거란주가 웃으며 용서하였다. 황자 석연구와 석연보가 아장에서 돌아왔다. 거란주가 친히 쓴 조서를 진제에게 보내고 또 해리(解理)를 통해 진제에게 말하기를, “손(孫)은 걱정하지 마라. 반드시 너에게 밥 먹을 장소를 마련해줄 것이다.”라고 하니, 진제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어 표를 올려 은혜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거란주는 헌납한 전국보(傳國寶)의 조각이 정교하지 않고〔追琢非工〕 - 追는 도(都)와 회(回)의 반절음이다. - 또 전대(前代)의 사서(史書) 기록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진짜가 아니라고 의심한 나머지 조서를 하달하여 진제를 힐책하면서 진짜를 바치라고 하였다. 진제가 아뢰기를, “지난번 당왕(唐王) 이종가(李從珂)가 스스로 불에 타 죽은 뒤로 옛날의 전국보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보아 필시 함께 불타버린 것으로 여깁니다. 이 보는 선제(先帝)가 만든 것으로서 백관이 잘 알고 있습니다. 신이 오늘날 어찌 감히 숨기겠습니까?”라고 하니, 거란주가 그만두었다. 진제가 거란주가 장차 황하를 건널 것이라는 말을 듣고 태후와 같이 전도(前途)로 나가 영접하려고 하자, 장언택이 먼저 아뢰니, 거란주가 허락하지 않았다. 유사(有司)에서 또 진제로 하여금 입에 구슬을 물고 손에 양을 끌게 하며 대신은 관(棺)을 싣고 교외로 나가 영접하게 하고자, 먼저 의주(儀注)를 작성하여 거란주에게 아뢰니, 거란주가 말하기를, “내가 기병(奇兵)을 보내어 곧바로 대량(大梁)을 점령하려는 것이지 항복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거란주가 또 조서를 하달하여 진나라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일체 옛날처럼 생활하고 조정의 제도도 모두 한(漢)나라 예절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 북방에서 중국을 한(漢)이라고 한다. - 유사(有司)에서 법가(法駕)를 준비하여 거란주를 영접하려고 하니, 거란주가 회보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갑옷의 차림으로 군대를 통솔하고 있으므로 태상(太常)의 의위(儀衛)를 시행할 겨를이 없다.”라고 하고 모두 사절하였다.
이보다 앞서 거란주가 상주(相州)에 도착하여 곧바로 병력을 하양(河陽)으로 파견하여 경연광(景延廣)을 체포하도록 하자, 경연광이 창졸간에 도망가지 못하고 봉구(封丘)로 가 거란주를 알현하였다. 거란주가 그에게 힐문하기를, “두 나라 군주가 화호를 상실한 것은 모두 너의 소행이다. 10만의 횡마검(橫磨劒)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고 교영(喬榮)을 불러 그로 하여금 서로 변증(辨證)하도록 하였는데, 그 사안이 10개의 항목이었다. 경연광이 처음에 시인하지 않다가 교영이 종이에 기록된 말을 보여주자, 시인하였다. 한 가지 사안을 시인할 때마다 산대 하나를 주었는데, 산대가 여덟 개나 되었다. 경연광이 단지 얼굴을 땅에 대고 죽여 달라고 청하니 그를 구금하였다.【79】
백관이 봉선사(封禪寺)에서 유숙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성북(城北)으로 나가 진제의 처소를 바라보고 작별의 인사를 드린 다음 소복(素服)과 사모(紗帽)로 갈아입고 길가에 엎드려 처벌을 청하니, 거란주가 초모(貂帽)와 초구(貂裘)의 차림으로 속에다 갑옷을 입고 높은 언덕에 말을 세우고 있다가 일어나 의복을 갈아입도록 명한 다음 다독거리며 위로하였다. 진제와 태후가 봉구문(封丘門) 밖에서 영접하니, 거란주가 사양하고 만나지 않은 채 문 안으로 들어가니, 백성들이 모두 놀라 달아났다. 거란주가 통사(通事)를 보내어 유시하기를, “나도 사람이니, 너희들은 놀라지 마라. 앞으로 마땅히 너희들로 하여금 소생하여 휴식하도록 할 것이다. 나는 남방으로 올 마음이 없었는데, 한나라 군사〔漢兵〕가 나를 인도하여 여기에 온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거란주가 명덕문(明德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궁중으로 들어갔다가 날이 저물자 다시 적강(赤岡)으로 나가 주둔하였다. - 인심이 한결같지 않아 두려웠으므로 감히 성안에 머물지 못한 것이다. -
거란주가 양승훈(楊承勲)을 잡아다 그에게 아버지를 죽이고 거란을 배반한 행위를 책망한 다음 주살하였다. 고훈이 ‘장언택이 자기의 집안사람을 살해한 것’을 하소연하고 거란주도 장언택이 경성을 약탈한 행위에 대해 노여워한 나머지 그를 구금하였는데, 백성이 앞을 다투어 투서하여 장언택의 죄상을 고발하자, 결국 전주아와 같이 북시(北市)에서 참수하라 명하고 고훈으로 하여금 형 집행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장언택이 전에 살해한 사대부의 자손들이 모두 상복(喪服) 차림으로 상장(喪杖)을 짚고 나와 통곡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상장으로 장언택을 때렸다. 고훈이 하명하여 장언택의 심장을 꺼내어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자,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장언택의 머리를 격파하여 골수를 취하고 살을 점점이 도려내어 씹어 먹었다. 거란주가 경연광을 그의 나라로 돌려보냈는데, 진교(陳橋)에서 유숙하다가 밤에 목을 매 죽었다.【80】
호씨(胡氏)가 말하였다.
진나라를 흥성시킨 자는 상유한이었고 진나라를 망하게 한 자는 경연광이었다. 두 사람의 마음 쓰는 바가 다른데도 똑같이 화를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구양자(歐陽子)가 말하기를, “본말이 순리에 맞지 않은데, 이적과 같이 일을 하는 자는 항상 화를 당한 것만 보았지 복을 받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81】
거란이 진제(晉帝) 석중귀(石重貴)를 부의후(負義侯)로 삼아 황룡부(黃龍府)에 안치하니, 황룡부는 곧 모용씨(慕容氏)의 화룡성(和龍城)이다. 거란주 야율덕광(耶律德光)이 사람을 시켜 이 태후(李太后)에게 말하기를, “듣자니 석중귀가 어머니의 명령을 따르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자신의 편의나 찾고 함께 떠나지 마시오.”라고 하니, 태후가 말하기를, “석중귀가 첩을 매우 신중히 섬겼고, 실수가 있다면 선군(先君)의 뜻을 어기고 양국의 우호를 끊은 것입니다. 지금 다행히 큰 은혜를 입어서 목숨을 보존하고 집을 보호하였으니, 어머니가 아들을 따르지 않고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거란주가 진제 및 집안 사람을 봉선사(封禪寺)로 옮기고, 대동절도사(大同節度使) 최정훈(崔廷勳)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다. 거란주가 자주 사자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는데, 진제가 사자가 온다는 말을 들을 적마다 온 집안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눈이 열흘을 연이어 내려서 외부의 공급이 끊어져 윗사람 아랫사람 모두가 추위에 떨고 굶주렸는데, 태후가 사람을 시켜 승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여기에서 승려 수만에게 밥을 주었는데, 오늘날 한 사람도 서로 생각하여 주지 않는다는 말인가?”라고 하니, 승려가 거절하기를, “노(虜)의 마음을 예측하기 어려워서 감히 밥을 드리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제가 문지기에게 몰래 빌어서 겨우 밥을 조금 얻었다.
이날에 거란주가 적강(赤岡)에서 군사를 이끌고 궁중으로 들어와서 도성의 모든 성문 및 궁전의 대문을 모두 거란의 군사로 수위를 하게 하였다. 또 대문에서 개를 잡아 사지를 찢고 대나무 장대에 양가죽을 매달아서 궁정에 세워 엽승(厭勝 주술로써 남을 압복(壓伏)함. 또는 그 주술.)을 삼고 진나라의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병갑(兵甲)을 다루지 않고 전마(戰馬)도 사들이지 않으며, 조세를 경감하고 요역을 줄일 것이니, 천하가 태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거란이 중국의 의관을 개조하고 백관의 기거는 모두 예전의 제도대로 두었다. 조연수(趙延壽)와 장려(張礪)가 다같이 이숭(李崧)의 재주를 추천하였고, 때마침 위승절도사(威勝節度使) 풍도(馮道)가 등주(鄧州)에서 입조(入朝)하였다. 거란주가 평소 두 사람의 명성을 들어서 모두 높은 예우를 하여 이숭은 태자태사를 삼아 추밀사(樞密使)에 보충하고, 풍도는 수태부(守太傅)를 삼아 추밀원에서 대기하며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였다.
거란주가 사자를 보내어 진나라의 번진(藩鎭)에 조서(詔書)를 내리니, 진나라의 번진이 앞다투어 표(表)을 올려 신하라 일컬었으나, 오직 창의절도사(彰義節度使) 사광위(史匡威)만이 경주(涇州)를 점거한 채 거란에 저항하였고, 웅무절도사(雄武節度使) 하중건(何重建)은 거란의 사자를 목을 베고 진주(秦州)ㆍ계주(階州)ㆍ성주(成州)를 가지고 촉(蜀)에 항복하였다. - 사광위는 사건당(史建塘)의 아들이다. -【82】
처음에 두중위(杜重威)가 진나라의 군사로 거란에 항복하니 - 두중위가 처음에 진제 석중귀의 이름자를 피휘하여 중(重)자를 떼고 단자의 이름 위(威)로 썼는데, 진나라가 멸망하자 다시 두중위로 불렀다. - 거란주가 그의 개갑(鎧甲) 수백만 벌을 모두 압수하여 항주(恒州)에 보관하고 몰고 온 말 수만 필은 그 나라로 돌려보낸 다음, 두중위를 보내어 그의 군중을 거느리고 자신을 따라 남으로 오게 하였다. 하수(河水)에 와서 거란주가 진나라의 군중이 변란을 일으킬 것이 두려워서 모두 호기(胡騎)로 교체하고 두중위의 군중은 하수에 몰아 넣고자 하는 것을, 어떤 이가 간하기를, “진나라의 군사가 다른 곳에 있는 숫자가 아직 많은데 저들이 항복한 자가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항명을 할 것이므로, 우선 어루만져 주고 천천히 그 계책을 생각하여 보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여, 거란주가 이에 두중위를 시켜 군중을 거느리고 진교(陳橋)에 주둔하게 하였다. 때마침 오랜 눈으로 관가에서 물자를 공급할 수 없어서 사졸들이 얼고 굶주려 모두 두중위를 원망하며 서로 모여 우니, 두중위가 밖으로 나갈 적마다 길가의 사람들이 모두 욕을 하였다.
거란주가 그래도 진나라의 병사를 죽이고자 하니, 조연수(趙延壽)가 거란주에게 말하기를, “황제께서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진나라를 취하셨는데, 스스로 차지하고자 하십니까? 장차 남이 취하게 하고 싶으십니까?”라고 하였다. 거란주가 얼굴빛이 변하며 말하기를, “내가 온 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5년 동안 갑옷을 벗지 않고 가까스로 얻은 것인데, 어찌 남에게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연수가 다시 말하기를, “진나라의 남쪽에는 당나라가 있고 서쪽에는 촉나라가 있어서 늘 원수가 되어 동서로 수천 리에 늘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고, 또 남쪽 지방은 덥고 습해서 상국(上國)의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 이때 한쪽 지방을 할거한 자들이 중원을 일러 상국이라고 하였는데, 진나라가 거란을 받들며 또 거란을 상국으로 일컬었다. - 뒷날 거가(車駕)가 북으로 돌아가서도 지킬 군사가 없으면 오나라와 촉나라가 필시 서로 허점을 보아 침공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어찌 남이 가져가게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거란주가 말하기를, “내가 지난날 상당(上堂)에 있을 적에 분할에 실패하여 당나라의 병사를 모두 진나라에 넘겨 주었더니, 얼마 안 되어 도리어 원수가 되어 북으로 향하여 나와 싸워서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하고 나서 가까스로 승리하였다. 지금 다행히 나의 손에 들어왔는데, 어찌 다시 남겨두어서 후환을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연수가 다시 말하기를, “지난날 진나라의 병사를 억류할 적에는 처자들을 볼모로 잡아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있었으므로, 지금 만약 그들의 가족을 모두 항주(恒州)ㆍ정주(定州)ㆍ운주(雲州)ㆍ삭주(朔州) 일대로 이주시킨 다음, 매년 번을 나누어 남쪽 변방을 지키게 한다면 어찌 변란을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거란주가 기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진교의 군사가 비로소 화를 면할 수 있어 본영으로 나누어 돌려 보냈졌다.【83】
진제 석중귀가 이 태후(李太后)ㆍ안 태비(安太妃) 및 아우 석예(石睿)ㆍ아들 석연후(石延煦)ㆍ석연보(石延寶)와 함께 북으로 옮겨가는데, 후궁 및 좌우의 수행자가 1백여 인이었다. 거란이 3백여 기의 기병을 보내어 호송하고, 또 진나라 중서령 조형(趙瑩)ㆍ추밀사 풍옥(馮玉)ㆍ마군도지휘사 이언도(李彦韜)를 함께 보내주었다. 중도에서 물자 공급이 끊기어 어떤 때는 태후와 함께 먹을 것이 없어서 구신(舊臣)이 감히 나아가 뵙지를 못하였다. 유독 자주자사(磁州刺史) 이곡(李穀)이 길에서 맞이하여 서로 마주 서서 울며 말하기를, “신이 못나서 폐하를 저버렸습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자기의 재물을 기울여 바쳤다. 진제가 중도교(中度橋)에 도착하여 두중위의 성채를 보고 탄식하기를, “하늘이여! 우리 집이 무엇을 저버렸다고 이 적(賊)에게 파괴되였습니까?”라고 하고, 엉엉 울면서 갔다.【84】
진제가 거란과 관계를 끊을 적에 광국절도사(匡國節度使) 유계훈(劉繼勳)이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가 되어 그 모사에 꽤 간여하였다. 거란주가 변주(汴州)로 들어갔을 때 유계훈이 입조(入朝)를 하니 거란주가 꾸짖었다. 이때 풍도(馮道)가 전상(殿上)에 있어서 유계훈이 급히 풍도를 가리켜 말하기를, “풍도가 수상(首相)이 되어 경연광(景延廣)과 함께 실로 이 모사를 꾸몄습니다. 신은 지위가 낮은데 어찌 감히 발언이나 하였겠습니까?”라고 하니, 거란주가 말하기를, “이 늙은이는 일을 많이 벌이는 자가 아니니 함부로 끌어들이지 말라.”라고 하고, 유계훈을 잡아가두고 황룡부(黃龍府)로 보내려고 하였다.
조재례(趙在禮)가 낙양에 있다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거란주가 일찍이 장종(莊宗)의 난이 나로 말미암아 일어났다고 말하였으니 - 황보휘(皇甫暉)의 난을 말한다. - 나의 이번 걸음이 참으로 걱정스럽다.”라고 하였다. 이때 거란이 거란 장수 술알(述軋)ㆍ해왕(奚王) 예랄(拽剌)과 발해 장수 고모한(高謨翰)을 보내어 낙양을 지키게 하였는데, 조재례가 정하(庭下)에서 배알하니, 예랄 등이 모두 걸터앉아서 절을 받았다. 이에 조재례가 정주(鄭州)에 도착하여 유계훈이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밤에 마판 사이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거란주가 조재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유계훈을 석방하였으나, 유계훈은 우분(憂憤)으로 죽었다. 유희(劉睎)가 거란에 있을 적에 일찍이 추밀사와 동평장사를 역임하였는데, 낙양에 도착하여 해왕을 꾸짖기를, “조재례는 한가(漢家)의 대신이고 너는 한낱 북방 추장일 뿐인데, 어떻게 무사할 수 있는가?”라고 하고, 뜰 아래에 세워 무릎을 꿇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낙양 사람들이 조금 안정되었다.
거란주가 사방으로 수많은 공헌(貢獻)을 받아들여 마냥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며 매번 진나라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중국의 일은 내가 다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일은 너희들이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연수가 상국의 군사들에게 늠식(廩食)을 제공할 것을 청하니, 거란주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법이 없다.”라고 하고, 이에 호기(胡騎)를 사방으로 내보내어 말을 먹인다는 구실로 번을 나누어 약탈을 시키며 이를 일러 ‘타초곡(打草穀)’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장정들은 창칼의 날에 죽고 노약자는 구렁텅이에 버려지니, 동기(東畿)ㆍ서기(西畿) 및 정주(鄭州)ㆍ활주(滑州)ㆍ복주(濮州) 수백 리 사이에 재물과 가축이 다 없어졌다.
거란주가 판삼사 유후(劉喣)에게 말하기를, “거란의 군사가 이미 진나라를 평정하였으니, 넉넉한 상사(賞賜)가 있어야 한다. 속히 대책을 세워 마련하라.”라고 하였다. 이때 부고(府庫)가 텅 비어서 유후가 도성 사민(士民)의 전백(錢帛)을 뒤져내어 빌려 쓸 것을 청하였고 - 도성은 대량(大梁)의 도성이다. - 또 사자 수십 인을 나누어 보내어 여러 주(州)로 가서 빌려 오도록 하였는데, 모두 엄주(嚴誅)로 압박하여 사람들이 살아남지 못하였다. 실상은 상으로 나누어준 것은 없고 모두 내고(內庫)에 쌓아 두었다가 제 나라로 실어보내려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안팎이 원망하고 분개하며 비로소 거란을 걱정하고 괴로워하며 모두가 쫓아낼 생각을 하였다.【85】
처음에 진제 석중귀가 하동절도사 북평왕 유지원(劉知遠)을 시기하면서도 북면행영도통(北面行營都統)으로 삼았는데, 유지원이 이 기회에 사졸을 많이 모집하고 또 토욕혼(吐谷渾)의 비축 재산을 많이 얻었다. 이로 말미암아 부강해져서 보병과 기병이 5만 인에 이르렀다.
진제가 거란과 원수를 맺자 유지원이 자신이 반드시 위태롭게 될 것을 알아차리고 논간(論諫)을 한 적이 없었다. 거란이 여러 차례 깊이 들어와도 유지원이 애당초 거란을 막거나 지원할 뜻이 없다가, 거란이 변주(汴州)에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에 유지원이 군사를 나누어 사경(四境)을 지키며 객장(客將) 왕준봉(王峻奉)을 보내어 세 차례의 표(表)를 받들고 거란주에게 가게 하였다. 하나는 변주에 침입한 것을 축하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태원(太原)에는 이(夷)와 한(漢)이 섞여 살기 때문에 수병(戍兵)이 집결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감히 진(鎭)에서 떠나지 못한다는 내용이며, 나머지 하나는 공물을 당연히 바쳐야 하나 거란의 장수 유구일(劉九一)의 군사가 토문(土門)에서 서쪽으로 들어가 남천(南川)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성안에서 두려워하며 걱정을 하므로, 이 군사를 불러들이기를 기다려서 도로가 비로소 소통이 되면 입공(入貢)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거란주가 조서를 내려 표창하며 유지원의 이름 위에 ‘아(兒)’자를 더 쓰고 다시 목괘(木枴)를 내려 주었으니 - 枴는 괴(乖)와 매(買)의 반절음이다. 노인의 지팡이다. - 이는 호법(胡法)에 대신을 우대하는 예로, 한법(漢法)의 사궤장(賜几杖)과 같다. 그러고 나서 거란주가 유지원은 관망(觀望)하고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사자를 시켜 유지원에게 말하기를, “네가 남조(南朝)도 섬기지 않고 또 북조(北朝)도 섬기지 않으니, 내심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공목관(孔目官) 곽위(郭威)가 또 유지원에게 말하기를, “노(虜)가 우리에 대한 원한이 깊을 것이나, 왕준(王峻)이 말하기를, ‘거란이 탐포하여 인심을 잃어서 반드시 중국을 오래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유지원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탈취할 것을 권유하니, 유지원이 말하기를, “용병에는 완급이 있으니 시기에 따라 적당히 제어할 것이다. 지금 거란이 경읍(京邑)을 점거하고 있으면서 아무 변고가 없으니, 어떻게 가벼이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가 이롭게 여기는 것을 보면 단지 재화(財貨)뿐이니, 재화가 만족하고 나면 필시 북으로 돌아갈 것이다. 더구나 빙설(氷雪)이 이미 녹아서 형편상 오래 머무르기 어려우니 마땅히 그가 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고 난 뒤에 취하면 만전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소의절도사(昭義節度使) 장종은(張從恩)이 땅이 회주(懷州)와 낙주(洛州)에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거란에 입조(入朝)를 하고자 - 노주(潞州)에서 택주(澤州)로 가서 또 회주로 가 하수를 건너면 곧 낙주의 하남부(河南府)이다. - 유지원과 모의하였다. 유지원이 말하기를, “그대가 마땅히 먼저 떠나야 합니다. 나는 뒤를 이어서 갈 것입니다.”라고 하니, 장종은이 그렇다고 하였다. 판관 고방(高防)이 간하기를, “공이 진나라의 의친(懿親)으로서 - 진나라 소제의 전 비 장씨가 황후로 책봉되었는데, 장종은이 아마 그의 후족(后族)일 것이다. - 신하의 절개를 가벼이 바꾸어서는 아니 됩니다.”라고 하였으나, 장종은이 듣지 않고 부사 조행천(趙行遷)을 유후(留後)로 남겨두고 인척 왕수은을 시켜 고방과 함께 보좌하라고 하고 드디어 떠났다.【86】
거란주 야율덕광이 진나라의 백관을 다 불러 뜰에 모아 놓고 묻기를, “우리나라가 광대하여 지금 사방으로 수만 리나 되고, 군장(君長)도 27인을 두었다. 지금 중국의 풍속이 우리나라와 달라서 내가 한 사람의 군주를 선택하고자 하는데 어떠하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말하기를, “하늘에 두 해가 없듯이 이(夷)ㆍ하(夏)의 마음은 다같이 황제(皇帝)의 추대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러기를 두세 번 한 뒤에야 거란주가 이에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미 나를 군주로 삼고자 하니, 지금 여기서 행할 것이라면 무엇에 우선을 두어야 하겠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왕자(王者)가 처음 천하를 차지하면 의당 대사면을 먼저 시행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거란주가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강사포를 입고, 정전에 올라가서 현악(懸樂)과 의위(儀衛)를 뜰에 설치하였다. 백관이 조하(朝賀)를 하는데, 화인(華人)은 모도 법복(法服)을 입었고 호인(胡人)은 호복(胡服)을 그대로 입고 문무 반열의 중간에 늘어섰다. 제서를 내려, 대요(大遼) ‘회동(會同) 10년’이라 일컫고 대사면을 한 다음, 다시 이르기를, “지금부터는 절도사와 자사가 아병(牙兵)을 두고, 전마(戰馬)를 사들이는 일은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조연수가 거란주가 약속을 저버린 데 대한 불만을 품고 이숭을 시켜 거란주에게 말하기를, “한(漢)의 천자는 감히 바라지 않겠으나, 빌건대 황태자는 시켜 주십시오.”라고 하여, 이숭이 어쩔 수 없이 거란주에게 말하니 거란주가 말하기를, “내가 연왕(燕王)에게는 비록 나의 살점을 베어내더라도 연왕에게 쓸 곳만 있다면 내가 아낄 것이 없다. - 거란은 조연수를 연왕에 봉하였다. - 그러나 내가 듣자니 황태자는 마땅히 천자의 아들로 세워야 되지, 어찌 연왕으로 세울 수 있겠소.”라고 하고, 그길로 연왕을 위하여 벼슬을 옮기게 하였다. 이때 거란이 항주(恒州)를 중경(中京)으로 삼았는데, 한림승지 장려(張礪)가 조연수를 중경유수 대승상 녹상서사 도독중외제군사에 임명하고 추밀사를 그대로 둘 것을 주의(奏擬)하였는데, 거란주가 붓을 잡고 ‘녹상서사 도독중외제군사’를 지워버리고 이를 시행하였다.【87】
당주(唐主)가 이경(李璟)이 제왕(齊王) 이경수(李景遂)를 세워 황태제를 삼고, 연왕 이경달(李景達)을 옮기어 제왕을 삼고, 남창왕(南昌王) 이홍기(李弘冀)를 연왕으로 삼았다. - 이홍기는 당주의 적장자이다. - 이경수가 언젠가 궁료(宮僚)와 연회를 가졌는데, 찬선대부 장역(張易)이 규간(規諫)할 것이 있었으나, 이경수가 막 객이 전해 주는 옥배(玉杯)를 구경하느라 돌아보지 않았다. 이에 장역이 화를 내어 말하기를, “전하는 보물은 중시하고 선비는 경시합니까?”라고 하고는 옥배를 가져다 땅바닥에 던지어 깨뜨리니, 군중이 모두 실색을 하였는데, 이경수가 드디어 자세를 가다듬고 사례한 다음 장역을 더 후대하였다.
이경달이 성품이 강직하여, 당주가 종실 및 근신들과 술을 마시는데, 풍연사(馮延巳)ㆍ풍연로(馮延魯)ㆍ위잠(魏岑)ㆍ진각(陳覺) 따위들이 온갖 아첨의 작태를 다하며 더러는 술김에 너털웃음을 웃고 하자, 이경달이 여러 차례 꾸짖고 다시 당주에게 영신(侫臣)을 친근히 해서는 아니 된다고 강력히 말하였다. 한편 풍연사는 당주의 두 아우를 세운 것이 자기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빈말이라도 자신의 덕이라 말하고 싶었다. 언젠가 동궁의 연회에서 이경달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나를 잊어서는 아니된다.”라고 하니, 이경달이 화를 버럭 내어 옷자락을 뿌리치고 금중(禁中)으로 들어가 당주에게 아뢰고, 목을 벨 것을 청하는 것을 당주 타일러 이해시켜 그만 둔 일이 있었다. 장역이 이경달에게 말하기를, “군소(群小)들의 서로간 결탁에는 화복이 걸려 있습니다. 전하의 힘이 그들을 제거할 수 없음에도 자주 면박을 주었다가, 가령 저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대비를 한다면 무슨 짓을 못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유연(遊宴) 때마다 이경달이 대개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당주가 사자를 보내어 거란이 진나라를 섬멸한 것을 축하하고, 또 장안으로 가서 당나라의 여러 능침을 복원할 것을 청하였다. 거란이 허락하지 않았고 사신을 보내 이를 알렸다.
진나라 밀주자사(密州刺史) 황보휘(皇甫暉)와 체주자사(棣州刺史) 왕건(王建)이 다같이 거란을 피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당나라로 망명하니 회북(淮北)의 도적의 우두머리〔賊師〕들이 대부분 당나라에 망명을 청하였다. 이에 당나라 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 사관수찬(史舘修撰) 한희재(韓熙載)가 상소하기를, “폐하께서 조업(祖業)을 회복할 때가 바로 지금 이때입니다. 만약 노주(虜主)가 북으로 돌아가고 중원에 주인이 있게 되면 도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막 군대가 복주(福州)에서 접전을 하고 있어서 북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당나라 사람들이 모두 한스러워하였고 당주 역시 후회하였다.【88】
하동의 장좌(將佐)들이 유지원에게 존호를 일컬어서 사방을 호령하며 제후들의 거취를 관찰할 것을 청하였다. 유지원이 허락하지 않다가, 진제 석중귀가 북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정형(井陘)으로 출병하여 진제를 맞아 진양(晉陽)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외친 다음, 지휘사 사홍조(史弘肇)에게 명하여 여러 군대를 모아놓고 출병할 날짜를 알렸다.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거란이 경성을 함락시키고 천자를 붙잡아서 천하에 주인이 없으니, 천하의 주인이 될 자가 우리 군주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 유지원이 북평왕에 봉해졌기 때문에 일컫는 말이다. - 마땅히 위호(位號)를 먼저 정하고 나서 출병하여야 됩니다.”라고 하며, 앞다투어 만세를 부르고 그치지 않았다. 유지원이 말하기를, “노(虜)의 형세가 아직 강성한데 우리 군사는 아직 위엄을 떨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우선 공업을 세우기를 기다려야 한다. 사졸들이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하고, 좌우에 명하여 만류하였다. 곽위(郭威)가 도압아(都押牙) 양빈(楊邠)과 함께 들어가서 유지원을 설득하기를, “지금 원근 사람의 마음이 모의하지 않고도 일치하니 이는 하늘의 뜻입니다. 왕께서 이 기회를 타고 취하지 않다가 인심이 한 번 옮겨진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유지원이 받아들였다.
거란이 그의 장수 유원(劉愿)을 보의절도부사(保義節度副使)로 삼았다. 섬주(陝州) 사람들이 그의 포학에 시달리어 봉국도두(奉國都頭) 왕안(王晏)이 지휘사 조휘(趙暉)ㆍ도두 후장(侯章)과 모의하기를, “유공(劉公)이 위덕(威德)이 멀리 드러나 있으니 우리들이 만약 유원을 죽이고 섬주성을 돌려준 다음, 천하를 위하여 주창한다면 부귀를 차지하는 것은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다.”라고 하니, 조휘가 그렇다고 하였다. 왕안이 이에 유원 및 거란의 감군(監軍)을 죽이고 조휘를 받들어 유후(留後)를 삼았다.
유지원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이가 후한 고조이다. - 스스로 말하기를 차마 진나라의 이름을 갈 수 없다 하고, 또 개운(開運)의 명칭이 싫어서 - 개운은 곧 진제 석중귀의 연호이다. - 이에 다시 천복(天福) 12년이라 개칭하였다. 조서를 내리기를, “모든 도(道)는 거란을 위하여 내놓던 전백(錢帛)을 모두 폐지하라. 진나라의 신하로서 협박을 받고 부역한 자는 불문에 부칠 것이니 스스로 행재소로 나오도록 하라. 그 나머지 거란인은 소재지에서 죽이라.”라고 하였다.【89】
호씨(胡氏)가 말하였다.
오대 시대 나라를 취하는 데서 오직 후당과 후한만이 그래도 좀 나았다. 대개 후량이 당나라를 찬탈한 뒤에 후당이 후량을 대신하였고, 후진이 거란에게 멸망하자 후한이 일어났다. 만약 이사원(李嗣源)이 장종(莊宗)을 핍박하고, 석경당(石敬瑭)이 노왕(潞王)의 자리를 찬탈하고, 곽위(郭威)가 후한 은제(隱帝)를 축출하지 않았다면 진나라가 노(虜)의 공격을 받을 때 유지원이 구제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조정의 권력은 이숭(李崧)과 풍옥(馮玉)에게 넘어가 있어서, 고명대신으로 상유한(桑維翰) 같은 이도 참여할 수 없었고, 병권은 두위(杜威)와 이수정(李守貞)에게 넘어가 있어서 훈구 중신으로 유지원 같은 이도 들을 수 없었다. 때문에 상유한이 이숭을 책할 수는 있겠으나, 후세 사람들이 화(楇)를 노렸다는 이유로 유지원을 책하지는 못할 것이다.【90】
[주-D001] 【79】 :
이상은 《자치통감(資治通鑑)》 285권 〈후진기(後晉紀)〉 제왕(齊王) 개운(開運) 3년조의 기사임.
[주-D002] 【80】 :
이상은 《자치통감(資治通鑑)》 286권 〈후한기(後漢紀)〉 고조(高祖) 천복(天福) 12년조의 기사임.
[주-D003] 【81】 :
이상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58권 후한(後漢) 고조(高祖) 천복(天福) 12년조의 기사임.
[주-D004] 【82】 :
이상은 《자치통감(資治通鑑)》286권 〈후한기(後漢紀)〉 고조(高祖) 천복(天福) 12년조의 기사임.
[주-D005] 【83】 :
이상은 《자치통감(資治通鑑)》 286권 〈후한기(後漢紀)〉 고조(高祖) 천복(天福) 12년조의 기사임.
[주-D006] 【84】 :
이상은 《자치통감(資治通鑑)》 286권 〈후한기(後漢紀)〉 고조(高祖) 천복(天福) 12년조의 기사임.
[주-D007] 【85】 :
이상은 《자치통감(資治通鑑)》 286권 〈후한기(後漢紀)〉 고조(高祖) 천복(天福) 12년조의 기사임.
[주-D008] 【86】 :
이상은 《자치통감(資治通鑑)》 286권 〈후한기(後漢紀)〉 고조(高祖) 천복(天福) 12년조의 기사임.
[주-D009] 【87】 :
이상은 《자치통감(資治通鑑)》 286권 〈후한기(後漢紀)〉 고조(高祖) 천복(天福) 12년조의 기사임.
[주-D010] 【88】 :
이상은 《자치통감(資治通鑑)》 286권 〈후한기(後漢紀)〉 고조(高祖) 천복(天福) 12년조의 기사임.
[주-D011] 【89】 :
이상은 《자치통감(資治通鑑)》 286권 〈후한기(後漢紀)〉 고조(高祖) 천복(天福) 12년조의 기사임.
[주-D012] 【90】 :
이상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58권 후한(後漢) 고조(高祖) 천복(天福) 12년조의 기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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